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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바다 위에서 피어난 생존과 욕망의 서사

by aicarrolls 2025.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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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2023년작 《밀수》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해양 범죄극이다. 김혜수와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김종수, 고민시 등이 출연하며, 바다를 무대로 생존을 도모하는 여성들의 연대와 인간의 욕망을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풀어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지평을 연 류승완 감독의 연출력과 시대적 감각이 빛나는 작품이다.

 

 

생존과 연대, 그리고 바다의 시대

《밀수》는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기,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모든 사람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대의 초상을 담아낸다. 류승완 감독은 기존의 남성 중심 액션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세상과 맞서는 서사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단순한 젠더 전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곧 ‘생존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복원하는 시도이자, 한국 사회가 잊고 있던 노동과 욕망의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창이다. 바다는 그들의 생명의 터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밀수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 노동’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밀수》는 유쾌한 웃음 속에 깊은 비극과 현실 인식을 품은 영화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생존을 잡는다

1970년대 충남의 한 작은 해안 도시 군천. 주인공 조춘자(김혜수)는 해녀 일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의 친구 엄진숙(염정아) 역시 마을의 생계형 리더로, 바닷속에서 고기를 잡으며 가족을 부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에서 우연히 ‘밀수품’을 건져올리게 되면서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한 번의 성공이 달콤했던 그들은 점점 더 큰 돈과 위험한 유혹에 빠져든다. 이 과정에서 조직폭력배 권상두(조인성)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인 범죄극으로 전환된다. 권상두는 해안 도시의 권력을 장악하려 하고, 춘자와 진숙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돈과 생존, 그리고 우정’ 사이의 갈등을 겪는다. 박정민이 연기하는 국세청 단속반 ‘조춘길’은 법의 이름으로 이들 밀수꾼을 추적하지만, 결국 그는 권력과 돈의 구조 속에 휘말린다. 영화의 후반부, 거대한 밀수선이 폭풍우 속에서 뒤집히는 장면은 생존을 향한 인간의 절박함을 압도적인 스펙터클로 그려낸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권력도 돈도 아닌, 바다를 사랑했던 인간의 끈질긴 의지였다.

 

 

등장인물과 연기의 깊이

김혜수는 다시 한 번 ‘여성 주체’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조춘자는 거칠지만 따뜻하고, 욕망과 정의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히 범죄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세상과 싸우는 한 인간이다. 김혜수의 연기는 절제와 폭발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녀의 눈빛은 바다처럼 깊고, 웃음 뒤에는 삶의 무게가 깃들어 있다. 염정아는 진숙 역을 통해 현실적이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친구를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냉정하게 선택해야 하는 인간의 복합성을 지닌다.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축이다. 조인성은 기존의 세련된 이미지를 버리고, 냉혈하고 폭력적인 범죄자 권상두로 분했다. 그는 욕망의 화신이자,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다. 박정민은 정의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공무원 캐릭터를 통해 권력의 부조리와 개인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들의 연기는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는 해안 도시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완벽히 구현한다. 조연진 김종수, 고민시, 표예진 등의 활약도 탁월하다. 특히 고민시는 젊은 세대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상징하며 영화의 세대적 균형을 잡아준다.

 

 

바다의 질감, 인간의 욕망

류승완 감독은 《밀수》를 통해 ‘한국형 해양 액션’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는 실제 해안 로케이션을 중심으로, 바다의 질감과 위험을 사실적으로 포착했다. 화려한 CG 대신, 거친 파도와 실제 잠수 촬영으로 리얼리티를 극대화했다.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가까이 포착하면서도, 때로는 바다 위에서 멀리 떨어져 그들을 ‘미물처럼’ 보여준다. 그 대비는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를 상기시킨다. 또한 편집은 리듬감이 살아있다. 해녀들의 물질 장면은 마치 안무처럼 구성되어 있고, 밀수 장면은 거대한 액션 시퀀스로 전환된다. 사운드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파도 소리, 숨소리, 물속의 울림이 관객의 감각을 자극한다. 배경음악은 1970년대 레트로 풍을 반영하면서, 유쾌함과 비극이 공존하는 정서를 완벽히 뒷받침한다. 류승완의 연출은 언제나 ‘리듬’과 ‘공간감’에 탁월했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여성의 시선’이 더해졌다. 그 시선이 《밀수》를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닌, 감정의 바다로 확장시킨다.

 

 

욕망의 바다에서 인간다움을 건져 올리다

《밀수》는 단지 범죄극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압축된 초상이다. 산업화와 개발, 그리고 부의 불평등이 만들어낸 시대의 이면이 ‘밀수’라는 키워드 속에 응축되어 있다. 그때의 밀수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감독은 이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춘자와 진숙은 범죄자이지만, 그들의 범죄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반면 권상두와 같은 인물들은 그 생존의 틈을 이용해 권력과 이익을 독점한다. 결국 영화는 ‘누가 진짜 죄인인가’를 묻는다. 또한 여성 연대의 힘이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시키는지도 보여준다. 춘자와 진숙은 서로를 배신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다시 손을 잡는다. 그 장면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세상이 무너져도 인간으로 남겠다는 선언이다. 《밀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 “돈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 이 단순한 진리가 영화 전편을 관통한다.

 

 

한국형 장르 영화의 진화

《밀수》는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사회적 구조 안에서의 폭력’을 다뤘지만, 이번에는 ‘여성의 생존’을 중심으로 그 구조를 새롭게 해석했다. 이로써 《밀수》는 한국 장르 영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시각적으로는 ‘레트로 누아’의 완벽한 재현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의 색감, 복장, 언어, 음악 — 모든 것이 정교하게 조율되어 관객을 그 시대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 시대의 이야기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 이 영화의 진정한 무게다. 오늘날에도 생존을 위해 타협하고,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밀수》는 그런 현실을 웃음과 액션으로 포장하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무겁다. 류승완 감독은 결국 말한다.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살아남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이 한 문장이 《밀수》의 모든 본질을 꿰뚫는다.

 

 

바다 위의 정의, 그리고 인간의 얼굴

《밀수》는 한국 영화가 장르적 재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품을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김혜수와 염정아는 ‘여성 듀오’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었고, 조인성은 시대의 악을, 박정민은 현실의 회색 지대를 표현했다. 류승완은 이 모든 캐릭터를 유머와 긴장감 속에 엮어내며, ‘바다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확장시켰다.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그린 회고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생존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다에서 밀수꾼처럼 살아간다. 때로는 법을 어기고, 때로는 양심을 지키며. 그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지켜주는 마음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의 유토피아’다. 《밀수》는 그렇게, 바다 위에서 인간의 얼굴을 다시 찾아낸 영화다. 그리고 그 얼굴은 거칠지만 따뜻하고, 상처투성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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