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중에 어부 창대를 만나 바다 생물의 기록서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흑백 영상미 속에서 인간의 존엄, 지식의 의미, 계급의 벽을 넘는 우정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설경구와 변요한의 깊은 연기, 그리고 이준익 감독 특유의 인간 중심 서사는 한국 사극의 새로운 미학을 보여준다.
흑백의 바다에서 피어난 지식과 우정의 이야기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의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화려한 색채 대신 흑백 화면을 선택함으로써, 본질에 집중하는 사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정약전(설경구)은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유배된 후, 흑산도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고립된 삶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는 바다 생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어부 창대(변요한)를 만나고, 그와 함께 바다 생물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단순히 책을 집필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계급과 세계관을 가진 두 인간이 ‘지식’이라는 다리를 통해 서로를 이해해가는 여정이다. 정약전에게 바다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였고, 창대에게 정약전은 세상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배움의 길’이었다. 영화는 그들의 교류를 통해, 인간이 진정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곧 타인을 이해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줄거리와 사건의 전개
영화는 유배된 정약전이 흑산도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학자로서의 자존심과 죄인으로서의 굴욕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문명과 단절된 섬의 현실에 점점 적응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의 어부 창대를 만나게 된다. 창대는 글을 모르는 평민이지만, 바다 생물에 대한 관찰력과 통찰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정약전은 그의 지식을 빌려 해양 생물의 분류와 생태를 기록하기 시작하고, 창대는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배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를 넘어서, 서로의 세계를 바꾸는 동반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교류는 시대의 벽에 부딪힌다. 창대는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약전 역시 ‘사상범’으로 감시받는다. 영화는 그들의 대화와 시선, 바다의 풍경을 통해 세상의 불합리와 인간의 존엄을 잔잔하게 드러낸다. 결국 창대는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섬을 떠나고, 정약전은 홀로 남아 ‘자산어보’를 완성한다. 그가 바다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지식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상징한다.
등장인물과 배우들의 연기
설경구는 정약전 역을 통해 ‘지식인의 고독’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대사는 절제되어 있지만, 표정과 호흡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권력에서 밀려난 지식인이지만, 여전히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변요한이 연기한 창대는 정약전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그는 문자는 모르지만, 삶의 본질을 아는 인물이다. 그의 대사는 거칠지만 진실하며, 세상에 대한 감각은 학문보다도 생생하다. 두 배우의 연기 호흡은 절묘하다. 서로의 신념이 충돌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적 존중이 피어난다. 특히 바다에서 두 사람이 물고기를 연구하는 장면, 그리고 서로의 세계관을 논하는 대화는 영화의 정수를 이룬다. 조우진, 이정은 등 조연진도 각자의 인물로서 현실의 질곡을 상징하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연출 그리고 철학적 미장센
이준익 감독은 ‘색’을 버림으로써 ‘의미’를 얻었다. 흑백 화면은 단순히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다. 화려한 사극 대신, 검은 바다와 흰 파도, 인물의 주름과 손의 흔적까지 섬세하게 담아내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카메라는 조용히 머물고, 대사는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관객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준익 특유의 인간 중심 연출은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그는 거대한 사건 대신, 일상 속의 철학을 포착한다. 바다의 리듬, 새벽의 안개, 노인의 숨결까지 영화의 언어가 된다. 음악은 최소한으로 사용되어 자연의 소리가 그대로 들리게 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 속의 일부임을 상기시키며, ‘자산어보’라는 제목의 의미를 더욱 강화한다.
자산어보 주제
자산어보는 단순히 책의 제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정약전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기록하려 하지만, 창대는 삶으로 세상을 느낀다. 이 두 세계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한다. 즉, 진리를 향한 탐구다. 영화는 지식이란 위계적 권력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과정임을 말한다. 또한 바다는 자유와 경계를 동시에 상징한다. 정약전에게 바다는 유배의 감옥이자, 새로운 학문의 공간이다. 창대에게는 생존의 터전이자, 신분의 벽이다. 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인간과 세계,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끊임없이 성찰한다. 그들의 우정은 곧 ‘계급을 넘은 인간의 가능성’이다.
자산어보의 의의와 여운
자산어보는 단순한 사극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화려한 세트 대신, 조용한 대화와 사유를 통해 진정한 지식의 의미를 탐구했다. 설경구와 변요한의 연기는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이끌며, 학문과 삶의 간극을 아름답게 메운다. 영화의 마지막, 정약전이 바다를 바라보며 “세상은 아직 배울 것이 많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적 겸허함과 존재의 존엄에 대한 선언이다. 자산어보는 한국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깊이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흑백의 바다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색을 가장 진하게 남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