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드라마에서 장르물의 변화는 단순한 유형 확대를 넘어 서사적 깊이와 감정 표현의 방식까지 재편한 흐름으로 이어져왔다. 초기 로맨틱 코미디가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산업의 중심 장르로 자리 잡았다면, 이후 스릴러·범죄극·누아르까지 영역이 확장되며 더욱 복합적이고 밀도 높은 세계관이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시청자 취향의 세분화, OTT 플랫폼의 도입, 콘텐츠 제작비 증가와 더불어 서사의 자유로운 구조 실험이 가능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본 글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누아르로 이어지는 장르물의 성장 과정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K-드라마가 어떻게 고유한 감정 구조와 서사 방식을 유지하며 장르적 진화를 이루어왔는지 탐구한다.
한국 장르물의 확장과 감정 서사의 변주
한국 드라마의 장르적 진화는 대중문화와 사회 변화가 적극적으로 맞물리면서 이루어진 흐름이었다.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 드라마를 대표한 장르는 명백히 로맨틱 코미디였다. ‘내 이름은 김삼순’, ‘커피프린스 1호점’, ‘시크릿 가든’ 같은 작품들은 사랑과 성장의 서사를 중심으로 하여 감정의 기복과 충돌, 오해와 해소를 유머와 따뜻함으로 표현했다. 당시의 장르적 성공은 작품마다 뚜렷한 감정선을 구축하면서도 일상적 삶의 결을 재현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시청자의 취향은 빠르게 분화되기 시작했다. 로맨스 중심의 감정 서사만으로는 충분한 만족감을 주기 어려워졌고, 더 강한 자극·더 정교한 서사·더 몰입도 높은 세계관을 향한 요구가 커졌다. OTT 플랫폼의 확대는 이러한 변화에 불을 지폈다. 플랫폼은 시청률 구조에서 자유롭고, 장르의 제한을 두지 않으며, 표현 수위나 주제의 무게감도 큰 폭으로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단일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스릴러, 범죄극, 법정물, 심리 누아르까지 다변화되었다. 특히 ‘시그널’, ‘비밀의 숲’, ‘나의 아저씨’, ‘마이네임’, ‘모범택시’, ‘D.P.’ 같은 작품들은 장르적 특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함으로써 감정의 층위를 더욱 깊게 확장했다. 로맨틱 코미디가 개인의 내면적 감정 변화에 집중했다면, 누아르나 스릴러는 사회 구조·제도·폭력·권력의 문제를 다루며 감정의 폭을 외부 세계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장르적 선호의 이동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가 감정 중심 서사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구조적 실험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장르물의 성장은 ‘감정의 재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밝고 따뜻한 감정 표현은 누아르나 스릴러에서도 형태를 달리해 지속되며, 인간의 고뇌와 선택, 관계의 충돌 같은 감정 요소가 장르적 틀 안에서 다시 해석된 것이다.
장르의 다층성: 로맨틱 코미디에서 누아르까지
한국 장르물의 확장은 내부적 구조 변화와 외부적 환경 변화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가장 먼저 로맨틱 코미디는 한국 드라마 산업의 ‘감정 서사’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져놓았다. 밝고 경쾌한 감정 흐름, 인물 간 관계의 발전,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비롯되는 드라마적 긴장 등은 한국 드라마가 감정 중심의 서사 구조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구조가 장르의 확장 과정에서도 중심적인 정서적 원리가 되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스릴러 장르가 본격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시그널’과 ‘비밀의 숲’을 기점으로 한다. 이 두 작품은 장르적 긴장감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물의 심리적 동기와 도덕적 고민을 장르적 서사 속에 배치했다. 즉, ‘범죄 해결’이라는 장르의 틀 속에서도 감정의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같은 서사의 특징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누아르까지 이어지는 한국 장르물의 일관된 정서적 특성이기도 하다. 누아르 장르의 성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마이네임’이나 ‘모범택시’, ‘D.P.’는 폭력과 구조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인물의 심리적 상처와 선택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했다. 누아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복잡한 인간 관계, 도덕적 회색지대를 특징으로 하지만 한국 누아르는 기존의 냉담함과 달리 감정의 울림, 인간적 연민을 서사 속 깊이 배치한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한국식 누아르는 디테일한 세계관과 감정 중심 구조를 함께 구축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장르적 확장이 단순히 스릴러나 누아르 쪽으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장르들이 서로 결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로맨스·판타지·범죄극을 결합한 ‘도깨비’, 청춘·스릴러·사회 고발이 결합된 ‘이태원 클라쓰’, 일상·음악·의학이 유기적으로 융합된 ‘슬기로운 의사생활’ 같은 작품들이 그 예다. 즉 장르의 경계가 흐려졌고, 장르의 틀은 감정 서사를 구조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트렌드 변화가 아니라 한국 드라마가 감정 서사의 견고한 기반을 활용해 장르의 확장성을 확보한 결과이며, 시청자의 취향 변화와 제작 환경의 다변화가 이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
장르의 확장에서 정체성의 재구성으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출발한 한국 드라마의 장르물 확장은 누아르·스릴러·범죄극까지 이어지며 이전보다 훨씬 넓고 깊은 서사의 스펙트럼을 구축하게 했다. 장르적 변화 속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유지해온 정체성은 감정 중심의 서사, 인물의 심리적 여정, 관계의 밀도였다. 이는 장르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하든 중심 감정의 리듬과 인간적 고민을 드라마의 핵심으로 두는 한국식 서사 철학이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 확장은 단순한 외형 변화가 아니라 서사 방식과 감정 표현 방식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사랑과 성장 서사는 누아르에서도 인간의 상처·선택·도덕적 갈등 같은 감정 구조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한국 드라마는 장르의 확장을 통해 서사의 층위를 깊게 만들었고, 감정의 결을 더욱 섬세하게 재배치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향후 한국 드라마의 장르물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그러나 장르가 아무리 확대되더라도 감정 중심 서사라는 정체성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장르적 실험을 기반으로 서사 구조와 정서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K-드라마는 여전히 인간의 삶과 감정에 대한 탐구를 중심축으로 삼아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