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는 현실 서사와 판타지적 장치를 결합하면서 고유한 미학을 형성해왔다. ‘도깨비’의 불멸 서사, ‘호텔 델루나’의 사후 세계, ‘시그널’의 시간 교차 구조, ‘나의 해방일지’의 극사실적 정서 등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서사 구조에서 어떻게 재배치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본 글은 이러한 스토리텔링 방식이 어떻게 감정의 밀도, 인물의 존재 방식, 사회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경계가 흐려지는 현대 서사
현대 한국 드라마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결합은 특정 장르에만 국한된 시도가 아니라 서사 구조 전반에서 나타나는 넓은 흐름이다. 과거 판타지는 비현실적 요소를 제공하는 장르적 장치로 기능했지만, 이제는 인물의 감정과 내면적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서사적 언어로 확장되고 있다. 이 변화는 시청자의 정서적 기대가 변화하면서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단순한 현실 묘사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감정의 깊이, 시대가 가진 불확실성, 개인의 내면적 균열 등을 판타지적 장치가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도깨비’는 초월적 존재가 겪는 감정의 고독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재해석했고, ‘호텔 델루나’는 사후 세계라는 비현실적 공간을 통해 인간의 미련과 상처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시그널’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무전기를 도입하여 현실 세계가 놓친 정의의 문제를 판타지적 장치로 보완했으며, ‘나의 해방일지’는 오히려 현실적 깊이를 극도로 강화함으로써 현실이 판타지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역설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처럼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는 더 이상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라, 서로의 의미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관계로 재구성되었다. 본 글은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구조적 특징을 단계별로 분석하며, 한국 드라마가 어떻게 현실성과 판타지성을 결합해 독창적 미학을 구축해왔는지를 살펴본다.
현실 기반 감정 구조 위에 구축된 판타지의 기능
한국 드라마에서 판타지는 단순한 장르적 재미를 넘어 감정의 깊이를 확장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한국 드라마 서사의 핵심이 인물의 감정 구조에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결합한 드라마들은 현실적 감정을 기반으로 서사를 구축한 뒤, 판타지적 요소를 감정 표현의 한계 지점을 확장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도깨비’는 판타지적 설정이 감정의 구조를 확장하는 대표적 사례다. 불멸의 존재라는 설정은 인간이 겪는 상실, 외로움, 시간의 흐름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특히 죽음과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극을 현실 세계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판타지는 이야기를 비현실로 이끄는 장치가 아니라 정서의 깊이를 현실보다 더 밀도 있게 전달하는 도구다. ‘호텔 델루나’는 사후 세계라는 판타지적 공간을 통해 인간의 미련과 죄책감, 화해의 필요성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만약 모든 이야기가 현실에서만 전개되었다면 다루기 어려웠을 감정들이, 판타지적 공간을 통해 상징성과 시각적 설득력을 동시에 획득한다. 판타지는 결국 현실의 감정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현실과 판타지가 결합된 스토리텔링은 감정의 진실성을 기반으로 서사를 펼친다는 점에서 한국 드라마의 고유한 미학을 형성한다.
현실을 보완하는 판타지: 서사적 결핍을 채우는 구조
현실과 판타지를 결합한 드라마는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해결하거나 재구성한다. 이때 판타지는 현실이 가진 서사적 한계를 보완하며, 시청자에게 새로운 관점의 해결 방식을 제시한다. ‘시그널’은 이러한 구조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현실 세계에서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시간을 초월한 무전기’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 접근하는 방식은 판타지가 현실적 정의의 결핍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설정은 단순한 SF적 재미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목격해온 정의 실현 실패의 감정적 갈증을 해소하는 서사적 장치다. 반면 ‘나의 해방일지’와 같은 극사실주의 작품들도 판타지성을 내포한다. 모든 것을 꾸미지 않고 드러낸 듯한 극도로 현실적인 감정 묘사는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에 시청자에게 판타지적 체험을 제공한다. 이 작품에서 판타지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극도로 정제된 현실 감정’이다. 현실의 고독과 무기력함이 극단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면서 시청자는 현실을 비현실처럼 경험하게 된다. 즉, 한국 드라마는 판타지를 외적 장치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정밀도를 높여 현실 자체를 판타지처럼 재구성하는 방식까지 활용한다. 이는 서사적 결핍을 채우는 한국 드라마 특유의 정서적 장치다.
감정 중심의 판타지와 현실의 상호작용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한국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에서 감정은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다. 판타지는 감정을 확장하기 위한 장치이며, 현실은 그 감정이 발현되는 기반이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하거나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한국 드라마 서사의 핵심 기술이다. ‘괴물’과 같은 작품은 현실에 기반한 범죄 수사극이지만, 서사와 연출은 현실을 초월한 감각을 만든다. 극도로 정교한 심리 묘사와 서늘한 장면 구성은 현실 세계의 범죄 서사를 판타지적 긴장감으로 끌어올린다. 이 작품에서 판타지는 명시적 장치가 아니라 정서적 분위기, 시각적 상징, 인물 간의 감정적 간극을 통해 구현된다. 한편 ‘도깨비’와 ‘호텔 델루나’는 감정 중심 서사에 판타지적 배경을 배치해 감정의 물성을 확대한다. 사랑, 미련, 집착, 희생 같은 감정은 현실에서는 표현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는 그 감정이 물리적 형태로 드러난다. 불멸, 사후 세계, 귀환 같은 장치는 감정의 언어를 확장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국 드라마의 판타지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감정의 정밀도를 확장시키는 조형 요소다. 이것이 현실과 판타지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이유다.
시각적·연출적 장치가 만드는 경계의 흐릿함
현실과 판타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서사뿐 아니라 연출, 미장센, 음악, 색채 등의 시각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라도 부조화되면 판타지 세계는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는 시각적 통일성을 중요한 전략으로 활용한다. ‘도깨비’는 따뜻한 색감과 신비한 조명을 통해 초현실적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현실적 공간 배치를 유지해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초월적 존재가 인간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촬영 기법과 조명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시그널’ 역시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구조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색조 대비를 활용했다. 과거는 따뜻하고 노스탤지어에 가까운 색감, 현재는 차갑고 직선적인 색감으로 구성하여 시간의 차이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대비는 판타지적 요소를 현실 서사 안에 안정적으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장치다. ‘호텔 델루나’는 미술 디자인 자체가 서사적 기능을 가진 대표적 사례다. 호텔이라는 공간을 현실과 비현실이 겹쳐진 상징적 장소로 설정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이 공간의 색채와 인테리어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시각적 판타지가 감정의 확장 장치로 기능하는 구조다. 이처럼 현실과 판타지의 결합은 연출적 설계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자연스러운 전체 미학을 완성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만의 ‘감정 판타지’ 미학의 출현
현실과 판타지가 결합된 한국 드라마는 해외 콘텐츠와 달리 감정 중심의 판타지 미학을 발전시켜왔다. 서양의 판타지가 주로 서사적 세계관과 모험 구조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한국의 판타지는 감정의 확장과 상징적 구조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도깨비’는 사랑과 상실이라는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판타지를 사용했고, ‘호텔 델루나’는 인간이 남긴 감정의 잔여물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감정 판타지를 구현했다. ‘시그널’은 사회적 정의의 감정을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으로 확장했으며, 극사실주의 작품인 ‘나의 해방일지’는 현실을 지나치게 정밀화함으로써 현실의 감정을 판타지처럼 체험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은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청자는 단순한 판타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깊이가 담긴 판타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는 이 요구에 부응하며 감정 중심 판타지라는 고유한 장르적 개념을 만들어냈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 해체는 한국 드라마의 정체성 확장
한국 드라마에서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장르적 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진실성을 더 깊게 전달하기 위한 미학적 전략이며, 현실 세계가 갖지 못한 정서적 해답을 제공하는 서사적 기법이다. ‘도깨비’, ‘호텔 델루나’, ‘시그널’, ‘괴물’, ‘나의 해방일지’ 등은 현실과 판타지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한국 드라마의 판타지는 세계관의 거대함보다 감정의 밀도에 집중하며, 현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기반이 된다. 두 세계의 결합은 시청자에게 더 넓은 감정 경험을 제공하며, 인간의 삶을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한국 드라마는 앞으로도 더욱 정교한 감정 설계와 시각적 미학을 바탕으로 확장될 것이며, 이는 한국 드라마의 정체성을 더욱 깊고 다층적으로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